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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으로 보는 김포지역의 6.25”

기사승인 2020.06.24  09:4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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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전쟁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의 폭풍 속에서 안타까운 목숨을 잃은 전사자와 억울한 희생을 당한 영령들의 상흔이 아직도 머물러 있다. 전쟁이 멈춘 지 70년이 되었지만 당시 전쟁 상황속에서 김포주민들의 생존과 삶의 질곡은 김포지역 현대사의 한 명암이다. 우리 부모세대들의 생명력을 확인하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역사적 교훈과 삶의 책임의식을 갖게 한다.
가족의 피눈물나는 전쟁의 아픔을 묻은 채 70년 삶을 살아온 가족의 증언이다     -편집자 주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나’라는 오랜 물음

조옥순(1934년생 93세) 고정2리 361번지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나라는 물음은 입밖으로 나오지 못한 오랜 물음이었다.
6.25 당시에 열 여섯 소녀였던 조옥순씨는 이제 93세의 어르신이고 당시에 7살이던 조문호씨는  77세의 어르신이다. 큰 딸 이었던 조옥순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마지막 장면이다.

“빨갱이도 아닌데 큰 댁에 마실가셨다가 붙잡혀가셨다. 돌아가셨는데, 그 전의 양조장집 아들이 학교 뒤에서 돌아가셨다고 찾아가라고 해서 찾아다 장사를 치루었다. 한참 전에 나가시고 돌아가셔서 집마당으로 모시고 왔다. 돌아가셨다고 모셔왔는데 얼굴은 덮어서 모르겠었다. 어머니가  보고 아버지라고 그러시더라. 어머니가 옷하고, 바지혁대보고 아버지라고 하시더라 ”

“억울하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난 어리니까 16살 인가, 그랬다. 어수룩했다. 어리니까 아버지를 마당에다 모셔놨는데 쉬쉬하고.  아버지가   “난 무슨 죄가 있다고 붙잡아가냐“고 한참 전에 나가시고 돌아가신 것이다”
큰 딸 조옥순의 기억속의 아버지 모습은 생생하다.

“멋있게 생겼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이뻤다. 올빽으로 머리를 싹 넘겼다”
그랬던 아버지에 대한 것은 대부분 기억이 안 난다.

“ 집 앞 마당에 돌아가셔서 마당에 모셔다 놓은 것은 기억나요. 아버지 없이 8남매가 살았다고. 먹고 살기가 아주 어려웠다. 공부도 못했고 어머니가 일시키면 일했다. 먹고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 8남매가 얼마예요. 어머니(신재임)는 자식들하고 고생고생하고 살다가 87살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조재억)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사를 지냈다. 8월인지, 그렇다. 나도 어려운 집으로 시집을 왔다. 아들 셋 낳고 28세부터 혼자서 지금까지 아이 셋을 길렀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어떻게, 왜 돌아가셨는지 알지도 못하고, 말도 닫고 살아야 했다.

 
“무슨 죄가 있어 도망을 가느냐”

조문호(1944년생 77세) 하성면 원산리 돌아가신 아버지(조재억) 영정사진을 안고 있다


동생 조문호씨가 기억하는 6.25.
“아버지가 집을 나간 지 열흘 되었나. 큰 집에서 붙잡혀가셨다고 했다.  양조장집으로 끌려가셨다고. 양조장집 아들(90)의 말은 양조장집 창고의 문 열어놓고 도망가라고 해도 아버지는 도망을 가지 않았다고, “무슨 죄가 있어 도망을 가느냐”고 하고 있다가, 잡혀서 바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별로 한 일은 없다. 부자집 셋째 아들로 깨끗하게 사셨다. 4형제중의 셋째로 기생처럼 사신 분이라고 들었다. 아버지 형제 중 막내 작은 아버지가 큰 아버지와 아버지를 모셔다가 장례를 지냈다고 했다. 첫째와 넷째가 모셔온 것이다”

“이 양반은 부잣집아들이라 내가 시장에서 아버지 이름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때 우리 당숙이 구장일을 봤어요. 아버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요. 돌아가시고 양조장집에서 연락이 왔는데 현장에 어머니는 못가셨고, 무슨 옷 입었냐고 가르쳐달라고 큰 아버지와 막내 아버지가 어머니께 물어서 아버지 시신을  찾아왔어요. 학교너머라고 태산 골짜기 거기. 누가 누군지도 몰랐대요.”

 조문호 (77세)어르신은  6.25 당시에 겨우 7-8살 어린아이였다.
“장사도 큰 집 산에다 지냈다. 부대 있는데 장사지내고 부대 안이라서 이장하라고 해서 지금 자리로 이사를 한 거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모두 전해 들었다. 누가 얘기할 수도 없고 묻는 사람도 이야기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그냥 살았다.”

“당시에 우씨라고 하는 지서장이 아버지 이름이 서류에 있다고 얘기하지 말라고 해서 쉬쉬하고 살면서 죄도 못지고 살겠다. 너희 집안은 신원조회 때문에 공직에는 못나갈 거라고 지서장이 말했다. 안 좋은 것을 빼달라고 했는데 빼주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100년이 다 되는데 어떻게 하나
“억울하게 돌아갔다고 해도 100년이 다 가는데 어떻게 하나! 우리 아버지가 8남매 놔두고 돌아가셨으니 우리 노인네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하셨겠나! 그때, 어머니(신재임)가 38세였다. 아버지는 세 살 아래 이셨다. 아버지는 35살에 돌아가셨다.”

“6.25때는 김포외갓집이 선수동이어서 그곳으로 피난을 갔었다. 같이 가셨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시 하성에 들어와서 잡혔다. 돌아가신곳은 피범벅이 되어서 누가 누군지 몰랐대요. 캐내고, 파내고, 누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서로 쉬쉬하니까 이웃들이 당한 것은 잘 모른다. 아버지가 밖에서 떳떳하다 죄도 없는데, 왜 도망가냐고 강직하게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조옥순(93) 조문호(77) 등 8남매와 어머니는 가장인 아버지 잃고 온 가족이 지금까지 ‘침묵’으로 갇혀있는 전쟁의 참혹함을 간직한 채 70년을 살아오고 있다.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을까’
이미 황혼기에 도달한 이 가족들에게 지역적 차원의 진실규명 노력과 희생에 대한 명예회복등을 위한 노력이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유인봉 대표이사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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