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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심씨, 일본15대 심수관(沈壽官) 424년만의 귀향

기사승인 2022.07.09  18: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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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향 김포, "귀향 고유제(告由祭)" 성대히 열려

9일, 일본 15대 심수관 본향 김포 귀향 고유제(告由祭)가 청심재에서 열렸다. 청송심씨 곡산공 도사공파종회원 120명과 대종회 심대평 회장외 문중일가 및 김병수 김포시장, 김주영 국회의원, 박상혁 국회의원을 비롯해 일본 · 국내 언론들이 대거 참석해 열띤 취재를 벌였다.

이날 일정으로 15대 심수관은 직계 9.10.11세조 헌화참배 및 고유제 봉행을 위해 본향의 선영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10세조 곡산공(양촌읍 학운재), 9세조 수찬공(대곶면 약산), 11세조 도사공(대곶면 약산)을 찾아 참배를 마치고, 청심재에서 열린 고유제에서는 초헌 15대 심수관, 아헌 도사공파종회 회장, 종헌 곡산공파종중 회장이 고유제를 봉행했다. 이어 청송심씨 후손인 심규순 명지대교수(중요무형문화제 이수자 97호)의 헌무가 이어졌다.

 400년의 시간과 한국과 일본이라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감동

환영행사에서 심대평 대종회 회장은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400년의 시간과 한국과 일본이라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는 감동을 오늘 목격했다. 심수관 가문은 전쟁포로라는 신분으로 일본 생활을 시작했으나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청송심씨라는 성도 버리지 않으면서 400이상 오로지 도자기 외길을 걸어 세계적 명가의 반열에 우뚝 섰다. 심수관 가문이 겪었을 고난에 깊이 공감하며 그 고난을 극복하고 이룩한 빛나는 성취에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 30만 청송심문이 심수관 가문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바람막이가 되겠다. 이 행사는 청송심문만이 아니라 이국땅에서 오랫동안 역경을 겪으면서도 뿌리를 잃지 않으려고 애쓴 어느 예술가 집안을 격려하는 뜻깊은 행사로 이해해 달라. 숭고의 정신으로 옛 선조들의 묘소를 정성껏 관리해 온 파종회와 돈목의 마음으로 집안일을 내 일처럼 돕는 일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선조님들도 정성을 갸륵하게 지켜보고 계시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약한 금고리보다 쇠고리가 되어야 한다."

축사에 나선 김병수 김포시장은 "424년만에 선조의 뿌리를 찾아온 15대 심수관 선생님을 환영한다. 약산마을을 지켜오신 어르신들과 문중께도 감사하다.  청송심씨가 우리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도예 작품을 출품하고 인정받으면서 도예명가가 되셔서 감사하다. 14대 심수관 선생님은 "금고리가 되지 말고 쇠고리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금고리는 비싸고 가치 있어 보이지만 약하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도록 하는 일이 네 일이다. 약한 금고리보다 쇠고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정신이 사스마야키를 탄생시킨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씀을 저와 김포시민이 나누고 우리 국민들이 함께해서 후대에 자랑스러운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먼길 찾아와 주신 심수관 선생님, 심대평 대종회장님과 문중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무려 424년이 흐른 지금, 저 15대 수관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종원 자녀의 꽃다발 증정에 이어 청송심씨 일가는 만지일근(萬枝一根, 만개의 가지가 있어도 뿌리는 하나 라는 뜻)을 비롯한 뜻있는 종원들의 선물을 전달했다. 15대 심수관은 감사의 말씀을 통해 “저 15대 심수관은 저의 뿌리가 이곳 경기도 김포 약산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기쁘기 그지 없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일본에서 살아갈 심수관 가를 대신해, 앞으로 심문의 영예를 높이고 조상님께 감사하는 겸허한 예술가, 한국과 일본의 친선에 가교가 되는 예술가, 세계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평화, 그리고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예술가가 되도록 더욱 정진하겠다. 16대, 17대 등 제 후계자들도 그런 예술가가 되도록 엄하면서도 자상하게 지도하겠다. 당길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끌려가신지 무려 424년이 흐른 지금, 저 15대 수관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400년 전 일본으로 끌려온 가문,  한국 성을 쓰고 있는 집안

뿌리를 찾았다고는 해도 피눈물을 가슴에 묻고 일본 생활을 시작하셨을 당길 할아버지 생각과 오늘 이곳에 와서 400년 넘게 조상님의 묘와 재실들을 정성껏 지켜 오신 여러 문중 일가분들을 뵙고 보니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일본에 온 저의 조상들은 400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묵묵히 도공의 길을 걸어왔다. 천리만리 떨어진,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도공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파도 앞에서 둑을 쌓고, 폭설 속에서 길을 뚫으며, 비바람 속에서 집을 짓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일이었다. 또 400년 전 일본으로 끌려온 가문중에서 지금까지 한국 성을 쓰고 있는 집안은 오로지 심수관 가밖에 없다는 사실도 함께 아뢰는 바이다.”라고 밝히며 눈물을 흘려, 참석한 이들이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따뜻하고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세계가 인정하는 도예명가 "사스마야키" 로 우뚝

한편 임인년 7월 9일, 15대 심수관은 일본에서 살아온 지 424년 만에 본향인 이곳 경기도 약산을 찾아, 시조 문림랑(홍부)의 10대손 도사공(都事公) 심우인(沈友仁)할아버지 앞에 엎드린 15대 심수관(沈壽官)은 삼가 향을 피우고 맑은 술을 올리며, 선조님들 영전에 귀향을 알렸다.

1592년 임진년과 1597년 정유년에 벌어진 일본의 조선 침략은 백성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도사공 할아버지의 아들인 찬(讃)(일명 당길(堂吉)) 할아버지도 1598년 음력 8월, 전라도 남원성에서 침략군 시마즈 요시히로군에게 납치당해 일본의 사쓰마 지방, 지금의 가고시마로 끌려가 낯선 이국땅에서 도공의 길을 걸어 사쓰마야키라고 하는 일본을 넘어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도자기를 만드는 도예명가로 우뚝 섰다.

편집국 mr@gimpo.com

<저작권자 © 미래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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